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리페 2세 (문단 편집) == '''"서류왕"'''으로서의 행적 == 펠리페 2세는 몸소 현장에서 뛰었던 아버지 카를 5세와 달리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를 인정받는 대가로 후대 왕들은 [[스페인]] 내의 정해진 궁정에서 [[스페인인]] 관리를 통해, 스페인 중심의 국정 운영을 요구한 카스티야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모든 정무와 전쟁 수행 등 사무 일체를 궁정 내에서만 보았다. 본인 또한 부왕에 비해서는 내성적인 성격이기도 했고. 때문에 현지 사정에 정통하던 부왕에 비해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그는 이러한 결점을 행정 체계의 개편을 통해 보완하려 했다. '''서류왕'''이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로 모든 업무방식을 서류를 통해 보고받고 결재했으며, 온종일 작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사무를 보았다. 이를 뒷받침하고자 모든 관료 임명권과 서임권을 자신의 권한으로 귀속시켜 스페인의 국정을 [[중앙집권제|중앙집권화]]했다. 이 방식은 오늘날 관점에서는 그 전에 비해 선진적이긴 했지만 처리 과정이 매우 더뎠고 당장 팩스도, 이메일도, 전화도 없는 시대에 서류로 통한 공무에 집착하다 보니 공무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게다가 결벽에 가까운 완벽주의자였던 펠리페 2세는 정부 전반에 걸쳐 직접적인 개입을 하면서, 결국 본인도 감당하지 못할만큼 불어난 서류의 산더미에 묻혀 행정 전반이 더디어지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서울대학교]] [[주경철]] 교수의 저서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에서 [[돈키호테]]를 다루며 '당시 스페인 왕은 하루에 처리할 서류를 저울로 재고 앉았을 정도로 대충 일했다'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농땡이 부리려고 저울로 서류의 양을 잰 게 아니라 무게라도 재면서 하루에 처리할 양을 정해두지 않으면, 펠리페가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며 똥도 못 쌀 정도로 업무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시황]]:???~~ 결국 말년에는 소화불량, 신경과민, 당뇨병 같은 '''현대 회사원들이나 걸릴 법한 병들로 고생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지방 및 대외 영지에서의 반발을 적절하게 수습하지 못하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게다가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하면서도 또 한번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이 아무리 실패적이어도 결코 바꾸지 않는 고집마저 강했다. 정작 그의 아들과 손자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경우 특정 관료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해 정국이 레르마 공작, 올리바레스 공작 등의 측근에게 놀아났다. 펠리페 2세는 반대로 지나치게 신하들을 불신하다 보니 모든 일을 직접 관리하다가 행정 전반에 심각한 차질을 낳았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처럼 검증되고 유능한 신료들과 관리들마저 그의 견제 탓에 기를 펴지 못했던 것이다. 또 평생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5개 국어를 구사하던 국제인이였던 부왕 카를 5세에 비해[* 물론 이 양반도 모어 프랑스어 외에는 능란하게 구사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펠리페 2세는 제대로 구사하는 회화는 모국어인 [[스페인어]] 하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는 소싯적의 통치 경험과 모계의 영향으로 알아듣기는 다 알아들을 수 있었으나 말하기가 안 됐고, [[프랑스어]]는 그나마 말하기가 가능했으나 성격 자체가 부끄러움이 많아 발음을 망치는 게 부끄러워 일부러 회화를 안했다. 결정적으로 치세의 대부분인 40년간을 자국 내에서만 보낸 탓에 뒤로 갈수록 그 정도는 더 악화됐다. 이 말은 결국 스페인어 하나밖에 제대로 못 했다는 건데, 스페인어는 불가타 [[라틴어]]의 방언이라 같은 불가타 라틴어의 방언인 이탈리아어, 포르투칼어와 어느정도 의사소통이 됐고(정확히는 카스틸리안어), 그나마 좀 이질적인 프랑스어도 당시에 "국제어"라서 누구나 어느정도 회화는 가능했는데다가 같은 로망스어 화자로써 매우 쉬웠다. 한마디로 [[네덜란드어]], [[독일어]], [[영어]] 같은 게르만계 언어는 하나도 못 했다는 말.] 정치 철학 또한 현장에서 모든 걸 지휘하는 타입이었던 카를 5세에 비해, 펠리페 2세는 '군주는 자고로 한 장소에서 국정의 모든 일을 내려다 보며 총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엄청난 전쟁 도발량에 비해 정작 본인은 평생 전장에 한 번도 직접 나간 일이 없었다. 게다가 상술했듯이 사무 또한 유연하지 않고 서류에 입각한 관료제 방식을 통해 수직적으로만 처리하였다. 이러한 행적을 통해 펠리페 2세의 성격이 내성적이고 폐쇄적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나 국내 순행만큼은 부왕 못지 않게 자주 했고, 가끔씩 경호원이나 측근을 일체 대동하지 않고 돌아다녔으며, 막상 신민들과 만나면 스스럼 없이 대해 주는 등, 외향적이라고까진 못하지만 나름대로 액티브한 면도 있었다. 동시대의 [[스페인인]]들은 펠리페 2세를 행차 도중에 억울한 일이 있어서 감히 왕의 행차에 끼어들어 탄원을 하려는 신민이 있으면 일부러 경비대를 무르고 그 말을 들어 주었던 '''친근하고 허례허식이 없었던 따뜻한 왕'''으로 기억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군주들은 1인칭을 '우리'라고 복수형으로 썼던 반면[* 이런 걸 '장엄복수형'이라고 한다.] 펠리페는 공문서 같은 무조건 형식을 따라야 하는 경우만 빼고 '나'라고 일반인처럼 말하는 걸 편하게 생각했고, 상술된 수도원 기숙사실 배정 문제처럼 일반 백성들의 사소한 문제라도 일단 자신의 눈과 귀에 들어오면--종교 문제만 안 걸려 있다면-- 따뜻하게 국왕이 직접 나서서 도와준 경우도 많았다. 펠리페 본인도 이런 격무가 지치긴 했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남긴 발언이나 편지들을 보면 '업무가 너무 많아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기진맥진하니 이해해 달라'와 같은 내용이 적지 않게 나온다. 심지어는 기분 전환 겸 왕궁 사람들과 함께 피크닉을 나왔는데, 그 곳에서도 서류 결재를 하고 있었다고. 이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서인지, 평소 펠리페는 육식을 매우 좋아했다. 심지어는 본인이 그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원래는 금식을 해야 하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고기를 먹어도 좋다는 관면을 [[교황]]에게 직접 받을 지경이었다. [[엘 에스코리알]] 왕궁-영묘-수도원 건설처럼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문화적, 이념적 사업과는 별도로 본인 자신은 허례허식을 경멸했다. 또한 문제나 일의 핵심에 집중하며, 나름 소박하고 서민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현지에선 유명한 일화로 마드리드로 천도한 이후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농부 성자 이시드로[* 교회박사 성 이시드로와는 동명이인.]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우물물을[* 어느날 성 이시드로는 밖에서 열심히 밭일하고 있는데 마누라가 깜빡한 사이 애가 우물에 빠졌으나, 하나님의 기적으로 우물물이 스스로 우물 위까지 차올라 아기를 건져 구할 수 있었다는 전승이다.] 떠마시는 이벤트를 주관하면서, 당시 전형적인 중세 및 근세 도시답게 오물 투성이었던 마드리드 길 한복판에서 서민들과 다 같이 줄 서서 물 떠마시고 같이 있던 시민들에게 덕담과 선물들을 배푼 일화도 있다. 대외적으로는 재위 초 네덜란드 순행을 끝으로 남은 40년간 이베리아를 떠나지 않았으나 포르투갈 왕위를 얻은 후 반기를 든 포르투갈 귀족들을 진압하고자 직접 [[리스본]]에 행차한 일이 있었고, 사실 네덜란드에도 알바 공의 반기 진압 이후인 1575년에 직접 행차 하려고 했는 등[* 병환과 가족 일 때문에 못 했다. 그리고 이 놓친 행차가 그의 평생을 괴롭히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터지는 것에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만 이후의 중요한 원정군에도 자기 자신만은 끝까지 쏙 빠지면서, 대신 누가 봐도 뻔히 한심한 아들을 국왕 대리로 투입한 것을 소심한 면모로 들 수는 있다. 이는 부왕이 겐트에서의 반란 당시 몸소 친정하는 의욕을 보인 것과 대조적인 점.] 재위기간이 길었던 만큼 대외적 활동 사항은 있다. 사실 아버지 카를 5세는 근본적으로 동서유럽에 걸쳐 거대한 땅덩어리를, 그것도 직접 통치했으니 다른 시기의 군주들과 견주어도 비교하기 너무 격차가 큰 대상이였다. 게다가 [[카를 5세]] 재위 중 [[스페인인]]들의 한가지 불만 요인이 "도대체 왕께서는 언제쯤 진득하게 왕좌에 앉아 계시는 것이냐"였다.[* 카를 5세의 재위 초기에 터졌던 카탈루냐 직공 길드와 카스티야 코무네로스의 봉기에서 반란의 주체였던 도시민들이 아예 봉건적인 사회 형태 자체를 뒤집으려는 사회 혁명적 슬로건을 내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귀족들 다수가 반란군들과 국왕군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나마 [[카를로스 1세]]의 성공적인 대외 정책으로 고양된 스페인인들이 이러한 국왕의 부재를 용인하고 지지해 준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카를로스 1세에게 후계자는 반드시 스페인에서 자란 '토착 스페인인'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탄압의 시초나 수많은 전쟁으로 인한 빚이나 펠리페 2세가 짊어져야 했던 짐들 중 다수의 시초는 부왕에게 물려받은 것 또한 적지 않다.] 이를 통해 펠리페 2세의 정주성은 스페인 내부적으로 보면 비록 반대파 및 이교도에 대한 적극적 탄압으로 말미암아, 그에 따른 반발 및 궁정 암투가 가속화되는 부작용은 있었으나 국가 정체성 강화에는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펠리페 본인도 이러한 자신의 국정 방침의 부작용 또한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국정에 뚜렷한 지역별, 과제별 통치에 특화된 현대 정부 부처 세분화의 선례가 되는 자문회의 설치와, 도로 및 우편 시스템의 전반적인 정비, 체계적인 정보 기관 구축 등을 통해 권력의 집중화에 따른 비효율적인 비대화 또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는 펠리페 2세가 '''통치해야 했던 땅의 범위와 문제들의 산재함'''에 비교하면, 당시 스페인 국정 체계는 타국에 비하여 훨씬 더 효율적이고 일관적이었던 편에 속한다. 총체적으로 평가하자면 '''아버지 카를 5세의 시절에는 여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적인 보편 제국에 가까웠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펠리페의 치세를 통해 스페인 중심의, 스페인이 주도하고, 주로 스페인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본격적인 [[스페인 제국]]으로 변화했다''' 정도로 말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